종교개혁사 나눔(7)

종교개혁사 나눔(7)

비운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 트라우마를 가진 제임스 6세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메리는 1살에 왕위에 올랐기에 귀족들에 의해 섭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 그녀는 프랑스로 가서 왕자와 결혼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밝은 미래를 꿈꾸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왕자와 사별을 한다. 이후 19살이 되어 돌아온 스코틀랜드는 절대왕정을 추구하던 프랑스와는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 스코틀랜드는 이미 종교개혁의 파도가 뒤덮고 있었다. 메리에겐 스코틀랜드는 종교로도, 실권으로도 자신의 나라가 아니었다. 메리에게 종교개혁을 밀어부친 존 녹스는 어떤 기억일까?

메리에 이어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 왕이 되는데, 그도 메리와 같이 1살에 왕위에 오른다. 메리는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제임스 6세를 가르친 조지 뷰캐넌은 왕에게 회초리를 대기까지 하였다. 납치를 당해 장로교회 제도를 전면시행하라는 강요도 받는다. 앤드류 멜빌은 왕을 대놓고 무시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특강종교개혁사’ 98-101쪽 참고) 제임스 6세의 생존전략은 ‘참고 마음에 담아두기’였다. 어쩌겠는가?

존 녹스-앤드류 멜빌의 종교개혁은 제도의 개혁이라는 측면에서는 박수를 침이 마땅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어두운 면을 기억해둘만 하다. 그들도 시대의 아들이기에 교육 방법론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기존 역사에 대한 개혁에의 갈망이 뜨거움으로 나타난 결과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길을 답습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사실 우린 이미 강압적인 신앙의 폐해를 잘 알고 있으며, 어쩌면 지금 우리는 그 결과를 마주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여파는 오래지 않아 나타난다. 제임스6세를 중심으로 잉글랜드와 통합한 이후의 모습을 보면 부정적인 결과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먼 역사에서는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나타난 종교전쟁에 대한 비판과 회의의 목소리가 울림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16:14)

#함께읽는종교개혁사 #2019년

종교개혁사 나눔(6)

종교개혁사 나눔(6)

가장 잘 개혁된 교회. 누가 이렇게 담대한 타이틀을 걸 수 있을까? 존 녹스는 이런 타이틀을 스코틀랜드 교회에 붙인다. 제네바에서 배웠지만 그 제네바에서도 제대로 일구지 못한 장로교회 제도를 스코틀랜드에 도입했기 때문이다.

마침 녹스의 개혁의지에 동참하는 귀족들이 있었기에 개혁은 급물살을 탔다. 또한 당시 왕보다 귀족들이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 메리 스튜어트는 1살에 왕위에 오른다 – 개혁은 더욱 순조로웠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유럽대륙 종교개혁의 여파로 종교개혁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땅이 이미 잘 다져진 상태였다.

존 녹스에게서 이어지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장로교회 제도를 국가적으로 적용했다는 점에 있어서, 그리고 이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실의 모판이 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그 유익을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연장선에 우리 역사도 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히 10:13)

#함께읽는종교개혁사 #2019년

https://ko.m.wikipedia.org/wiki/존_녹스

종교개혁사 나눔(5)

종교개혁사 나눔(5)

에드워드6세가 짧은 임기를 마치고 피의 메리가 잉글랜드 여왕이 되어 피바람이 불었을 때 종교개혁을 바라던 신자들은 깊은 실망 또는 좌절 또는 괴로움에 빠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날들은 생각보다(?) 짧았고 종교개혁을 지지해주는 (듯한?) 엘리자베스1세가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적당한 종교개혁 의지는 개혁을 바라는 이들에게 또다른 실망을 안겨주었다. 

예수님외에 그 누구도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복을 가져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의 재림의 날까지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은 유보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리 신실한 성도나 집단이 최고권력을 잡거나 큰 힘을 가져도 그 나라의 아름다움은 볼 수 없다. 신자가 바라는 이상은 주의 재림이 오기 전까지 오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이 땅에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1907년의 부흥을 바라는 마음이 무엇인지 한 번 쯤 재고해보아야 한다.

이 땅의 부족함과 아픔은 예수님이 가져오실 그 나라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 현실에서 안주하지 않게 하고 바른 방향성을 잡아준다. 그 방향성을 따라 부지런히 살아간다. 그러나 그 날이 오기까지 슬픔과 괴로움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많은 눈물이 있을 것이다(계 21:4). 이 고백은 모든 시대 교회의 동일한 바람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2:20)

#함께읽는종교개혁사 #2019년

https://ko.m.wikipedia.org/wiki/에드워드_6세

종교개혁사 나눔(4)

종교개혁사 나눔(4)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왕과 여왕에 의해 시작되고 진행되었다. 잉글랜드 왕 헨리8세는 첫째 부인이었던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로마 교회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렇게 까지 캐서린이 맘에 들지 않았을까? 아들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30년 동안 왕권 계승 문제로 싸운 장미 전쟁의 아픔이 그의 마음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러면 세 번째 결혼에서 아들을 얻었으면서도 왜 결혼을 세 번이나 했을까? 그저 새로운 부인을 원했기 때문일까? 무엇이 헨리8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까?

어쨌든 왕 또는 여왕의 정책에 따라 종교개혁은 가속도가 붙기도 했고, 정체되기도 했다. 정치가, 어쩌면 한 사람의 마음이, 종교개혁의 속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헨리8세는 과감히 로마 교황과 결별했고, 그 아들 에드워즈6세는 그 연장선에 있었지만 그의 왕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딸이라서 버림받았던 첫째 부인 캐서린이 낳은 메리 튜더가 여왕이 되었을 땐 피바람과 함께 로마 카톨릭으로 회귀하였다. 종교개혁은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피의 메리도 오래 정권을 잡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1세가 여왕이 된다. 둘째 부인 앤 불린의 딸이었는데 어쩌면 가장 헨리8세와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베스1세는 왕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써 적당한 수준의 종교개혁을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누가 왕/여왕이 되었는가에 따라 개혁의 속도와 정도에 변화가 생겼다. 정치와 경제와 같은 현실이 우리 믿음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신자와 교회의 삶에 큰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려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딤전2:2) 

#함께읽는종교개혁사 #2019년

종교개혁사 나눔(3) – 종교개혁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종교개혁사 나눔(3) – 종교개혁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종교개혁사상’에서 16세기 초 서구교회가 봉착한 문제를 가리켜 수장부터 말단 성원에 이르는 총체적 개혁의 필요라고 하였다. 또한 서구교회 전반 – 제도, 관습, 사상 – 의 철저한 혁신의 필요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문제가 총체적인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혁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어윈 루처는 다음과 같이 종교개혁의 배경에 대해서 서술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가톨릭 교회는 개혁이 절실한 실정이었다. 많은 교회 지도자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퇴폐적으로 살았고, 이로 인해 평신도 예배자들은 냉소주의에 빠졌다. …  “그 시대엔 교회 질서가 너무 많은 잘못으로 부패하여 본연의 자리를 제대로 지키는 성직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냥개와 매와 돌아다니며 사냥에 탐닉하는 자도 있었고, 술집을 운영하거나 사악한 감독관 노릇을 하는 자도 있었다. … 거의 모두 공개적으로 아내나 첩을 여럿 두고 파렴치한 삶을 살았다.” – 하룻밤에읽는종교개혁이야기, 22-23

전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가 다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처럼 넓고 넓은 그리고 오래 묵어 냄새가 진동하는 문제들 사이에서 어떤 문제가 핵심인지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만큼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오랜 기간을 통해 형성된 교회 부패 문제인 만큼 뒤틀리고 왜곡된 신학과 전통이 그 주춧돌이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성경 해석과 자신들을 위해 덧붙인 전통들이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교황제도와 일곱 성사들과 같은 문제들이 그 위에 놓여있다. 부패한 본성에서 말미암은 더러운 죄들이 그 주위에 그리고 사이사이에 화장실의 곰팡이처럼 끼어 있었다. 종교개혁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 위에 선 사람들이 잘못된 성경 해석과 부패한 전통과 싸우고 기울어진 교회를 바로 잡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를 위해 돌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었다. 하나님은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 그 결과 각 개혁가들이 다양한 출신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의 공통분모로 종교개혁의 역사를 쓸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이상, 또는 그저 현실에 대한 반향으로 시작한 일이었다면 역사의 양상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종교개혁 역사가 아니라 어느 지역이나 특정 수도회의 갱신운동 정도가 되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주님의 교회 전체를 새롭게 하는 역사를 일으키셨다. 

종교개혁자들은 말씀에 의해 교회를 늘 새롭게 해야 함을 외쳤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

 나는 …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1,3,6)

#함께읽는종교개혁사 #2019년

종교개혁사 나눔(2) – 누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까?(2)

종교개혁사 나눔(2) – 누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까?(2)

Cattermole, George; The Scribe; The Cooper Gallery; http://www.artuk.org/artworks/the-scribe-68808

이름 없는 사람들의 수고와 희생이 종교개혁을 만들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책을 필사했어야 했다. 그런데 위클리프가 번역한 성경이 아직도 170권이나 남아있다. 한 명의 전문필사자가 성경 한 권을 필사하는 데 대략 10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수많은 필사자와 그 비용을 감당했던 사람들, 성경을 읽고 보존한 사람들이 있었다.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은 위클리프와 같은 사람과 그와 함께 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였다.

루터 때에도 그가 번역한 성경을 인쇄하고 판매하고 전하고 읽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와 함께 한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다. 칼빈에게는 그를 쫓아다니며 그의 설교를 기록한 사람이 있었다. 그를 떠민 사람도, 그와 함께 한 사람도, 그의 뒤를 이은 사람도 있었다. 동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참혹한 핍박을 견뎌낸 위그노들도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종교개혁을 일군 일꾼이었다.

자기 자리에서 신앙을 지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감당했던 사람들 모두 종교개혁가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기 자리에서 바른 신앙을 지키고 수호하는 사람들 모두가 종교개혁가이다. 그들이 개혁의 불씨이며 가능성이다. 그들을 통해 교회는 갱신된다. 그들의 존재와 숨결, 그들의 말과 행동이 교회를 개혁한다.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마 24:45; 고전 4:2; 딤후 2:2; 갈 5:22).

양화진에 가면 이름 없는 묘비들이 많다.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 하나를 주목하지만, 하나님은 맡은 일에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을 눈여겨 보신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의 말씀을 지킨 사람들도 주님은 아신다(계 3:8). 사람들에게 무명한 자이지만, 하나님께 유명한 자이다(고후 6:9). 오늘 우리가 가진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말씀을 따르는 순종의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 루터와 칼빈도 홀로 종교개혁의 역사를 이루지 않았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의 교회를 새롭게 하신다. 그의 백성들을 통해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8)

#함께읽는종교개혁사 #2019년

종교개혁사 나눔(1) – 누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까?(1)

종교개혁사 나눔(1)

누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까?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조 반박문(1517)을 붙인 마틴 루터일까? 칼빈보다 먼저 신학강요(1521)를 쓰고 가장 이른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고백서인 아우그스부르크신앙고백서(1530)를 쓴 멜란히톤일까? 루터보다 일 년 앞서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의 깃발을 든(1516) 츠빙글리일까? 칼빈주의의 시초가 된 칼빈일까?

종교개혁 역사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일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종교개혁의 배경이 되는 인쇄술의 발전과 르네상스는 어느 한 사람의 일도 아니었으며, 종교개혁을 위한 대비도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주님의 교회를 바로잡고 새로이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일으키신 역사이다. 주님이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 지금도 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 역사의 주인이시며 교회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교회가 붙잡을 소망이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함께읽는종교개혁사 #2019년

종교개혁사상 – 알리스터 맥그라스

종교개혁사상 – 알리스터 맥그라스

Q. 왜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16세기의 개혁에서만 사용하는가?

A. 서구 교회 전반 – 제도, 관습, 사상-의 철저한 혁신의 필요성 인식과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사회적, 지적 차원 전부를 포괄하는 개혁이었다.

 

Q. 16세기 초 서구교회가 봉착한 상황은 무엇인가?

A. 수장부터 말단 성원에 이르는 총체적 개혁의 필요

(1) 교회의 법적 체계

(2) 교회의 관료정치

(3) 성직자들의 도덕적 해이

마키아 밸리 – 르네상스 후기 이탈리아의 도덕적 해이는 교회와 성직자로 인한 것

(4) 고위 성직자들의 배정 문제

보르기아(Borgia)가문은 1492년 돈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Q. 16세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A. 교회의 행정적, 도덕적, 법적 개혁을 호소하였다.

(1) 교회의 부도덕성 제거해야

(2) 교황이 세속적인 일에 덜 몰두해야

(3) 성직자들이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

(4) 교회 행정이 간소화되어야

(5) 부패를 추방해야

많은 사람들이 1세기 사도시대를 회고하며 그 시절 교회의 단순성과 열정을 동경하였다.(26)

 

Q. 종교개혁가들은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A. 그들은 대중의 요구 너머의 것을 보았다. 교회가 처한 상태는 질병의 외적 징후였기 때문에, 보다 근본적으로 기독교 교리, 신학, 종교사상을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다. 당시 교회가 가진 질병은 (1) 기독교 신앙에서의 이탈, (2) 지적 정체성 상실, (3)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모습의 실패였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를 이해하지 않고 개혁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Q. 또 어떤 사회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가?

A.

(1) 교육 받은 평신도들이 증가했다.

(2) 교황의 권력이 약해졌다. 반면 세속정부의 권력은 증대되었다.

 

Q.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의미는 무엇인가?

A. 제2차 슈파이어 의회(1529.2.) 후 생겨난 말로써,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양심의 자유와 종교적 소수파의 권리를 주장한(1529.4.) 6명의 독일 제후와 14개 도시의 저항 또는 항의에서 유래하였다.

 

Q. 로마 가톨릭은 개혁을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는가?

A. 로마 가톨릭도 트렌트 공의회(1545) 이후 재건운동을 한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개혁으로 흔히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고 불린다. 성직자들의 행위, 교회의 규율, 종교교육, 선교활동과 관련한 개혁 조치를 하였다. 또한 수도회를 개혁하였고, 예수회(Jesuits)를 설립하였다. 이처럼 사회적 개혁 요구를 따라 많은 폐단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본질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교리, 종교이데올로기, 교회는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Q. 종교개혁에 대한 또 다른 사람들의 평가

A.

(1) 베른트 묄러(Berndt Moeller)

루터의 종교개혁을 도시가 받아들이면서 도시 공동체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종교생활로 인한 유대감과 만인제사장 교리로 인한 공동체의 일체감을 가져다 주었다.

(2) 토마스 브래디(Thomas Brady)

지배계층(귀족, 상인연합)은 대중의 저항운동으로부터 자신들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3) 스티븐 오즈먼트(Steven Ozment)

이신칭의 교리가 중세 말 고해성사와 반-펠라기우스 교리가 주는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면죄부, 연옥의 정죄, 성자를 향한 기도 등은 사람들에게 많은 심리적 부담을 주고 있었다.

첫 번째 질문: 내가 생각하는 종교개혁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 ‘내가 생각하는 종교개혁의 원인’은 무엇인가?

돌아오는 주일부터 오후 모임 때 ‘특강 종교개혁사'(황희상)를 함께 읽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예고편’부분을 읽습니다. ‘예고편’을 읽어보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써보시면 좋겠습니다. 틈틈이 참고자료를 올려드리니 참고로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

 

다음 질문 예고: 칼빈/루터는 누구인가?(칼빈/루터 뒷조사)

중세후기와 종교개혁 시기 – 유스토 곤잘레스

중세후기와 종교개혁 시기 – 유스토 곤잘레스

중세후기

교황권 몰락의 징후가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때(1303)부터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까지

성장하는 부르주아는 여러 나라의 군주제의 협력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봉건체제는 끝나고 근대 국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가주의 그 자체는 곧 교회 일치에 장애가 되었다. 이 시대의 중요한 기간 동안에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 전쟁”을 벌였고, 대부분의 다른 유럽 국가들도 또한 그 전쟁에 관여했다. 이 시대는 또한 “페스트 전염병”의 때였따. 이 전염병으로 인해 유럽의 인구가 상당히 감소되었으며 그리하여 인구 통계학과 경제학상에 대변동이 일어났다.

교황권의 몰락은 분명히 그리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첫째 프랑스의 보호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교황청은 로마에서 프랑스 접경 지역에 있는 아비뇽(1309-1377)으로 이동되었다. 그 후 “서방교회의 대분열”(1378-1423)이 왔으며, 이 때 두 명의 교황(때로는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나타나서 서로 성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주장했다.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고 아울러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공의회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이 운동의 바램은 전체 교회의 공의회가 진정한 교황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공의회 운동으로 분열은 끝나고, 모든 사람이 단 한 사람의 교황에 대해 합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공의회 자체가 분열되었고, 그 결과 이제 교황은 하나이지만 공의회는 둘이 되었다. 곧 이어 교황들은 르네상스 정신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교황들은 교회의 영적인 생활에 관한 것보다는 로마의 재건과 아름다운 궁전의 건축과 다른 이탈리아 세력들과 전쟁을 하는 데 더 관심을 두었다.

교황권처럼 스콜라 신학 – 즉, 대학에서 행한 신학 – 또한 위기를 맞이했다. 더욱 더 애매한 특성과 전문화한 어휘에 근거한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인들의 일상생활과의 관계가 더욱 멀어졌으며, 오직 신학자들에게만 관심있는 주제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몇 가지 개혁운동들이 있었다. 존 위클리프와 존 후스와 지랄라모 사보나롤라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어떤 다른 사람들은 교회의 개혁이 새로운 학문의 결과로서 나타날 것을 바랬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기보다는 신비주의에서 그들의 안식처를 찾았다. 이 신비주의를 통해 그들은 영적인 생활을 계발하였고, 부패하여 개혁이 불가능한 교회와는 상관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였다.

한편 비잔틴 제국은 더욱 쇠약해졌으며 마침내 터키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정복과 종교개혁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에서 16세기 말(1600)까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들이 이 시기에 발생했다. 그 하나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정복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이다.

비록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정복을 교회사에서는 거의 취급하고 있지 않지만, 매우 유명한 사건들이다. 그러나 불과 백년밖에 안되는 이 기간에 유럽은 세계의 많은 지역,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그 결과 자칭 기독교인들이 전례없이 수적으로 많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서반구의 정복은 현재 교회사의 중요한 부분이며, 교회는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루터가 그의 유명한 95개조를 발표한 1517년을 보통 종교개혁을 시작한 연대로 잡는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이전에 오랫동안 개혁운동이 있어 왔지만, 개혁운동을 피하라 수 없는 계기로 만든 것은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을 반대한 사람들 모두가 루터와 그의 신학에 동조를 한 것은 아니었다. 곧이어 또 다른 운동이 스위스에서 나타났다. 처음에는 쯔빙글리의 지도하에, 그 다음에는 칼빈의 지도하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으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탄생하였다. 이보다 더 급진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적들은 그들에게 “재세례파” – 다시 세례받는 사람들이라는 뜻 – 라는 경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이 종교개혁파에서 메노파(Mennonites)와 몇몇의 다른 그룹들이 파생하였다. 영국에서는 다른 종류의 개혁이 나타났다. 이것은 개신교신학(특별히 칼빈신학)을 따르면서 교회 정치와 예배에 관한 고대의 전통들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영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이며, 여기서 오늘날의 “성공회”와 “감동파”(Episcopal)라는 이름의 교회들이 파생되었다.

부분적으로는 종교개혁의 결과로써,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내부의 역동성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도 또한 이른바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으로 불리는 새로운 움직임을 겪었지만, 이 움직임은 종교개혁에 대한 단순한 반응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많은 갈등과 전쟁을 경험하면서도 개신교는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에서는 오랜 종교전쟁을 치른 후 일시적으로 타협을 한 결과, 왕은 가톨릭교도였지만 개신교 신자들을 인정하였다. 스페인, 이탈리아, 폴란드와 다른 나라들에서는 개신교를 무력으로 억압하였다.

 

–  유스토 L. 곤잘레스, 간추린 교회사, 23-26.